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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3일 새벽 분노에 대한 선언 나는 늘 분노에 차있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피바이로스, 다 잘 될 것이라고 허상을 갖는 것이 부정이다. 망각이다. 그러니까 분노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내가 불쌍하다고 말한다. 늘 감정적이고 불편만 말한다고. 그런데 말이지. 인간사회는 평화로운가. 동물도 사람도 죽어가는데. 돈돈돈, 학벌, 연애와 결혼과 출산 압박, 날씬한 몸애, SNS, 아파트 단지, 재개발, 다 화가나. 다. 내가 막내 딸이라는 것도, 방사능 사고도 다. 나는 분노하고 제대로 절망하는 것이 희망과 가장가깝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내가 살기에는 정말 쓰레기 같은 곳이다. 숨 막혀 살 수 없다. 그 구조에 내가 어떤 형태든 공모하고 있다는 것도 화가난다. 나는 늘 누군가를 짓밟고 짓밟히고 둘 중에 하나로 구분할 수 없는 무언가 일 때 그 힘이 어디서 왔는가를 묻게된다. 세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노력이나 평등이나 평화는 허상일뿐이다. 다 거짓이다. 세상은 지옥이다. 죽지 않으니 사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노력을 안할 것이고, 최대한 일을 안 할것이다. 아무것도 열심히 안 할 것이다. 출근을 해도 화장실에 최대한 많이 가서 멍때릴 것이다. 사회가 잘 못 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징징대지 말라고 한다. 싫다, 나는 계속해서 징징대며 짜증을 낼 것이다. 분노를 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분노도 열심히 해야한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것은 싫다. 그러나 분노부터 시작하자. 이상.
분노일기1.txt#0277
(1)엄마가 다쳤다. 엄마가 다쳐서 걱정이다. 그러나 생각도 못 한 변화도 있었다. 아빠가 가사를 열심히 한다. 엄마는 걷지 못 하는데 아빠가 도와준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도와준다"는 부분이 너무 분노한다. 엄마는 아빠는 다른 집 주인(남편)보다 낫다고 한다. 나는 분노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돌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것인가.
분노일기2.txt#0276
(2)유튜브에서 유퀴즈가 떠서 봐버렸다. 이 시점에서 한번 분노한다. 잘 못 눌렀다.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 인터뷰였다. 여러가지 짜증이난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외모 (백인이라든가)면 헬로~, 하이~ 무조건 영어로 말을 건다. 한국어를 한다고 알면 한국어 잘한다고 칭찬한다. "한국어 온지 얼마나 되셨어요?" 정형구다. 짜증이 밀려온다. 분노하면서 보는 나에게 화가난다. 이어서 본다. "한국인보다 한국어 잘 한다, 난 한국인인데 한국어 잘 못 해" 하면서 웃는다. 골때린다. 재미도 없다. 반응하기 곤란하다. 항상 그렇다. 못 보겠다. 짜증이난다. 난 외국부인인 것을 들키지 않을려고 노력한다. 들킨 순간 상대와 나의 관계에 권력이 생기고 공기가 바뀐다. 그래서 나는 내부인인척을 애써서 한다. 한국어를 못 했을 때 무조건 "네"를 했다고 실페한 일이 많다. 그게 내가 외모가 그나마 내부인과 비슷해서 가능했다. 근데 내부인이 누구인가. 국적을 갖는 국민인가. 같은 언어나 문화를 사유하는가. 같아는 것은 무엇인가. 동일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적을 갖는 재일조선인 친구들도 내부인이 될 수가 없다고 했다. 제도, 언어, 사회적 인식, 여러 차원에서 외부인과 내부인의 경계는 애매하게 달라진다.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은 항상 소수자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절대 "우리"에 들어가지 못한다 것을 그때 그때 확인 한다. 병원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인터넷에서. 너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그 메시지는 폭력적이라기보다 겉으로는 아주 친절하게 말을 건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내가 일본에서 누군가에게 보내왔던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무의식이든, 의식적으로든. 뉴스에서는 아프간난민들은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라고 부른다."특별"하지 않으면 "기여하지"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일년마다 출입국관리사무서에 가서 비자를 갱신해야만 한다. 분노는 계속되는데 나는 내가 "우리"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분노일기3.txt#0278
비오는 날1.MOV#0265
비오는 날2.MOV#0266
죽은 소의 냄새가 섞어가는 냄새가 계속 나를 미치게 한다 분명히 거기에 있었던 분명히 거기에 살았던 기억은 현실이고 현실은 너무나도 잔훅해서 사람들은 거짓이라고 비웃는다 아침에 일어날 때 마다 빰을 누군가가 떼린것 같은 그 충격도 밤이 깊어 갈 때 파도의 그 반복도 나에게도 공포가 아닌 따른 무언가로 변해 새벽의 깊은 바란이 새벽의 밝은 냉장소 소리 새벽의 울음 소리 시계는 없지만 시간은 가는 것 같은 그 착각 몸은 있지만 나의 것이 아닌거 같은 그 시점 뿌리는 늘 뽑힌 체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섞어가는 냄새 불타는 냄새 남겨 진 자들의 목소리 의미없는 반복 그런 소리 그런 소리 변기 옆에서 사는 사람은 더렵다고 안 느껴 그것이 더 나에게 용기를 주니까 혐오한다는 것은 그것에 집착하고 의존한다는 거니까 나는 망설이고 초라하고 어쩔줄 모른다 망설이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서투른 그 지점 나는 그 거기에 있다 바람은 나를 위해서 부르지 않아 바람은 너를 위해서 부르지 않아
시(1).txt#0262
비가 내리는 거를 알았지만 나는 우산을 안 챙겨 나왔다. 나는 비가 정말 싫다. 그런데 비의 소리는 조금 좋아하기도 하다.내가 비에 안 맞는다면. 저녁에 들어가는 그 가을의 냄새. 강아지가 소리를 치고 바람이 약한 차가워지는 그 냄새를 맡으면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오겠구나,라고 느끼며 조금 슬프고 눈물이 날 것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가을은 날씨가 좋아도 마음이 술렁술렁하다. 생각해보니 마을을 표현하는 말들은 정말 많다, 라고 느끼는 저녁이다. 달이 정말 이쁜데, 이쁘다고 느끼고 있는 나의 이 감정도 사실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다. 어떤 날 비가 내리기 시작한 그 때의 아스팔트의 냄새를 맡는데 뭔가 기분이 좋더라고. 우산이 없어서 뛰어가는데 왜 비맞으면 안될까, 순간 그런 생각을 하다가, 비 맞으면 왜 감기를 걸리지, 그 생각을 하다가, 옛날 학교에 걸어가는 데 우산을 써도 온몸이 다 비에 젖어서 학교 선생님이 농담으로 우산 안 썼어? 이러는 게 그렇게 화가나서 선생에게 화풀이로 소리 친 것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그 때 그 옷도 우산도 기억하는 데 어디로 갔을까, 그 원피스와 빨강색 우산은. 공사장의 소리. 달리는 차의 소리. 빗소리. 오늘도 하루가 시작한다. 비가 내리면 내 곱슬머리는 평소보다 더 많이 고불고불한다. 그런 내 머리가 너무 싫었다. 어릴 때 내 머리를 보고 애들은 야키소바라고 놀렸다. 이쁜 야키소바면 되는데 내 야키소바는 오른쪽만 고불고불하고 위에 올라간다. 그 모습이 엄마와 닮아서 싫었다. 발도 다른 여자아이보다 커서 맞는 신발이 없었다. 지금도 여자 250은 안 맞고 남자 250 신발을 신는데 여자 250과 남자 250의 차이는 아직까지 모르겠다. 그게 그렇게 싫었다. 엄마에게 왜 나를 발 크게 낳았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화를 낸 적이 있는데, 엄마는 그냥 미안하다고 했고 나를 안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케나다의 서커스단의 공연을 봤는데 그 때부터 서커스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 되었다. 그 것때문에 처음으로 도쿄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초록색 새 바지를 입고 갔어. 사람 많고 그랬는데 선물 가게에서 팝콘을 사려고 줄섰었는데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 근데 그 순간 나같은 못 생긴애 그런거 당할 일도 없다고 나를 타이르고 있었다. 나같은 애가 그런 대상이 될 일이 없다, 그래 나의 착각인 것이다. 그 때 그 옷은 다시는 입지 않았다. 정말 이쁜 초록색 바지였는데. 그 때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 초등학교6학년과 중학교1학년 사이, 봄 방학였다. 어째든, 그래도 서커스가 정말 멋졌다. 안 좋은 기억인지, 좋은 기억인지 섞어있는데 그런 느낌 있잖아. 잘은 모르겠는데,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느낌. 그래서 메일 자기가 만든 유연체조를 억지로 했어. 덕분에 허리를 다쳤다. 그 때 이후 나는 디스크 환자로 살고 있는데, 사실 그 체조운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세가 좋지 않아 언젠가는 디스크 환자가 될 운명이었다고 본다. 근데도 엄마한테 울면서 또 뭐라고 했다. 너무 아파서 움직이지 못 했을 때 말이다. 왜 건강하게 안 낳았냐고. 정말 불효자?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의 잘못은 없다. 근데 엄마는 또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왜 자세가 안 좋은지 하나 또 할 이야기가 있다. 중학교 때 커져가는 가슴이 그렇게 싫었는데 엄마한테 브래지어를 사 달라고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다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브래지어를 쓰기 시작했는데,엄마가 눈치 채서 알아서 사주는 것을 기다렸지만 엄마는 신경을 안썼다. 웃긴 것은 학교 규칙으로 여자애들 속옷이 다 하양색이어야 했다는 것이다. 신발도 양말도 다. 이유가 더 웃기다, 색깔이 있으면 남자들을 유혹한다는 이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겨 죽는다. 근데 말이지 나도 그렇고 아이들은 다 그렇다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강색이나 검은 브래지어를 입은 여자애들을 선생에게 고자질하기도 했었다. 정말 무서운 데에서 나는 살았구나. 엄마는 아이를 좋아하거나 그런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엄마가 젊을 때는 여자들이 결혼하면 당연히 퇴직하고 애를 낳은 것밖에 없었으니 그냥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없으니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꿈이 있었냐고 물어봤는데 생각을 해본적 없다고 했다. 여자들은 결혼하고 애를 낳고 주인(남편)을 집안일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당연했다고 했다. 그것이 행복이라고는 안 했지만. 그러니까 뭐랄까, 교육이라는 것보다 그냥 내가 시끄러우면 울어도 밖에 내버리고,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맞고 그랬는데 그게 별로 이상한 것이라 느낀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도시에서 생긴 친구가 한번도 부모에게 맞은적 없다고 해서 정말 놀랐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말을 안 들으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근데 그것 말고는 공부를 하라는 소리는 들어본적 없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하게 해주기는 해서 나쁘지 않는 부모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엄마도 아빠도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가족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우리 집은 오빠와 엄마 아빠, 나는 막내였고 화장실에는 생리대를 버리는 박스는 없었다. 어른이 되서 친구네 집에 가서 놀랐던 것은 화장실에 생리대를 버리는 박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냥 가정집에서 생리대를 버리는 박스가 있구나. 생리가 시작했던 옆집 언니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월경 시작을 축하하며 빨강색 밥을 이웃에 돌리는 관습때문에 주변 집들은 다 그 언니가 생리시작했다고 알게되었다. 우리 집에서도 그 밥을 나눠 받았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언니가 불쌍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생리 시작하는 것을 틀긴것은 욕이 었으니까. 싸우다가 "너 생리하잖아"이러면 상대는 얼굴을 빨갛게 하고 울었다. 어떤 여자애는 생리대 파우치를 떨어 뜨렸는데 남자아이에게 그것이 틀겨서 그 때 이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생리가 늦어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긴데 "난 아직 생리 안 하거든!" 이러면서 다른 여자애들보다 뭔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남자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좀 특별한 아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남자아이들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자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못 했고 나는 남자도 여자도 싫고, 그것도 아닌 무언가가 되고 싶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엿다. 나는 세상에 혼자라고 노울을 보면서 항상 생각했다. 생리가 시작하는 것도 가슴이 커지는 것도 싫어했다. 정말로. 그래서 멘날 허리를 삐지 않고 가슴을 최대한 안 보이게 다녔다. 그래도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면 남자아이들이 깔깔 웃으면서 여자들이 달리는 거를 구경했다. 그게 정말 싫었고 억울했다. 여자들은 그래서 일부로 열심히 안 뛰었고 제대로, 열심히 하는 것은 바보같은 것이었다. 나는 운동하는 거를 정말 좋아했고 수영도 좋아했는데 수영시간에는 여자들은 다 견학을 했었다. 몸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생리었는지, 수영하는 여자아이는 나와 한 두명정도 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여자아이들이 정말 바보같고 싫었다. 그런데 내가 남자아이 무리에 들어가지 못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같은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생각하면 소름 끼쳐서 나는 아이를 절대 안 낳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중학생 때 였을 것이다.
이야기1 .txt#0263

깊은 밤이라는 게 있다고 믿어?

나는 항상 깊은 밤에서 일어난다. 깨는 것이 아니라 앉아있었던 것 같아.

의식이 바다를 헤엄치듯 흘러 나간다.

밤에 혼자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와 내 컵에서 넘치려고 한다.

뚝뚝 누가 문을 두드리는데 나오니까 거기엔 내가 서있었다.

안녕, 어 안녕.

냉장고가 소리를 내며 순간 눈을 떠보니 거기엔 내가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구멍이라고 부른다.

구멍, 공허, 아무것도 없는 무(無)

그게 뭐 어때서?

목욕탕에 혼자 뜨거워지는 얼굴을 물속에 넣고 상상한다.

이 물이 계속 뜨거워지면 나는 뼈가 되고 녹아버릴거라는 생각을 했던 6살 때 나를.

있잖아 생각해보니 심해에 갈 수 없구나. 내가 나의 내장때문에 폭발해버려.

내가 심해에 도달하기전에 나의 육체와 의식은 분열해버릴 것이다.

그런데 못 가지는 않지, 심해는 빛이 도달하지 않지만 서서히 내려가니까.

안녕, 어, 안녕.

난 마무야, 너는?

이야기2.md#0275

무의미한 거를 하는 날의 목표

-어른쪽만 걸어가기/ 왼쪽만 걸어가기/ 바닥 같은 색깔만 다니기

-카페에서 커피 아닌거 마시기 (커피가 너무 먹고싶어도 참기)

-식당에서 제일 맛없어보이는 것을 시켜 먹기

-광고 전화를 받고 이야기 들어보기

-길가에 앉아 있기

-식물을 한시간 정도 보고 있기

-책의 냄새 맡기

-땅 파 보기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 하기

-은행에서 번호표 먼저 뽑고 뒤에 와서 사람 많아서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기

이야기3.md#0289

아릴때 있잖아. 장을 보고싶거든. 그래서 돈도 없는데 장을 보고 싶어서 하루에 3,4번 같은 마트에서 계산까지 한 다음에 지갑을 까먹었다고 하고 죄송하다고 하는 "놀이"를 몇번이나 했다가 자주 직원에게 혼났다.

혼날 때는 엄머 어디있어? 이런 식으로 혼났는데, 엄마는 밖에서 일을 했다. 공장에서.

그래서 그런지 나는 부모님에게 공부나 학교 생활때문에 혼난적은 없지만, 학교 선생이나 이웃 어른들에게는 많이 혼났고 버릇없는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을 나도 알 고 있었다.

학교에서 부모들 사이에서 우리 부모님은 왕따라고 난 생각해서 슬펐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발적?! 왕따였기에 왕따가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아빠도 집단으로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같지는 않았다.

어느날 학교 수업 참관날에 어떤 동급생의 어머니가 나를 불러 혼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왜 혼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교에서 자주 엄마에게 전화가 가서 몇번이나 죄송하다며 엄마가 머리를 숙이는 일이 많았다.

어떨 때는 소방훈련을 하는데 다들 신발 신은 채 운동장에 도망가야하는 훈련이 있었다. 근데 나는 이게 훈련인데 왜 신발을 신은 채 도망가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래서 나랑 한번 또 있었는데 그 친구만 신발을 갈아 신고 운동장에 나갔더니 교사에게 이러다 너희는 화재로 죽었을 것이라고 엄청나게 혼났고, 학우들은 그 말을 듣고 죽었을 거라고 놀렸다.

그 때도 아마도 엄마에게 전화가 갔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끝나고 음악 동아리를 했었는데 ( 이것도 이상한게 자연스럽게 남자들은 운동, 여자들은 음악을 하는 분위기 였다) 내가 클럽 대표를 했었다. 왠지 어릴 때는 자주 눈에 뛰고 싶고 그랬다. 지금은 전혀 안 그렇다.

근데 그 교사가 쉬는 날 없이 주말도 방가 후도 계속 연습을 시킨 것 있지. 그래서 친구들은 그 남자 교사를 싫어했어.

그래서 난 제안을 했지. 싫으면 안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친구들과 작전을 만들어 이번 주말은 연습을 다 같이 결석하기로 했고, 다 같이 결석해야지 교사에게 저항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 나름 단체 교섭을 하려고?!했던 것 아닌가 칭찬을 받고 싶다.

근데 주말이 되니까 또 부모님께 전화가 가더라고. 누군가가 혼자 출석했고 교사에게 다 이야기를 해버렸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이 일이 나 혼자 꾸민 일이고 내가 강제로 파업?!을 시켰다고 이야기 한 것이었다. 슬펐다.

또 엄마는 학교에 가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나는 얌전해야지 엄마를 귀찮게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거짓 사과와 눈치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

학교가 끝나면 멘날 슈퍼에서 미역 라면을 사 먹었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슈퍼 옆에 앉아있었는데 뭐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근데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항상 노울을 보면서 울고 사라지고 싶다고 느꼈지만 "괜찮아, 너에게는 수많은 너가 안에 있으니 괜찮아"라고 자신에게 내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 하면서 버티었다.

나는 가끔 욕조나 화장실에서 내가 나라는 몸에서 빠져 나가는 거를 느끼기도 했다.

*

남자 아이들은 공원에서 축구를 하는데 여자들은 그거를 보고 남자애들 구경 했다. 누가 멋지다거나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수다를 떠는데 난 왜 여자애들을 껴주지 않는지 화가 났다.

어느날 남자애들보다 먼저 공원에 도착해서 내가 먼저 왔다고 내가 야구를 할거라고 야구 장비를 들고 써있었다. 여자애들에게 같이 야구를 하자고 했지만 여자애들은 싫다고 했다. 남자애들은 나를 놀리고 앞에서 축구하기 시작했어.

나는 여자애들에게 짜증났다. 나약한척 바보인척 하는 애들에게 화가 났다.

*

급식 가위 바위 보 라는게 있었다. 누가 결석하면 급식이 몇개 남을 때가 있었다. 국이나 나물은 남으면 자유롭게 더 먹을 수 있었지만 코로케나 밥 우유 등은 갯수가 정해져 있어서 결석이 나와야지 먹고싶은 애들이 앞에 나와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항상 가위바위보에 참여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데 여자애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우유가 싫었고 우유는 메일 따른 애에게 주고 주는 대신에 다른거를 받고 그랬다.

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귀속말로 자기 대신에 가위바위보에 나가 달라고 했다. 너는 항상 나가니 부끄럽지 않잖아, 라고 했다. 이유는 많이 먹는거를 다른 애들이 보는거 싫어했기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줬지만 왜 나에게 부탁을 하는지 살짝 기분 나빴다. 근데 그게 내가 보여줘왔던모습이긴 했다. 누군가가 나를 여자 취급하는것이 싫어했기에 남자들만 하는 것이 용납할 수 없었다. 집에서 여자니까 하면서 오빠보다 일을 많이 시키는 것도, 밥을 조금 덜 주는 것도.

나는 여자든 남자든 똑같다고 생각했지만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차이가 각인되니까 나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여자이기 싫은데 여자라는 이름으로 틀에 넣어버리니까 그거를 거절하려면 그것과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하지만 여자가 아니면 남자라는 선택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자들에게는 거절을 당한다. 여성스로움의 틀에 들어가지 못 한 나는 또 여자들에게 거절을 당한다.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내가 하는 행동이나 좋아하는 것을 여자/남자의 틀 안에서 이야기 되는 것이 불편했다. 근데 내가 누구인지 가끔 모르게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나를 만든 것은 나의 말이나 행동들인데, 그 것도 나의 것은 아닌 것 같은 것 있지...

근데 지금 생각하면 여자들, 남자들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일대 일로 만나면 여자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 없이 자주 놀았다. 아 근데 노는 방식도 또 달랐 던 것은 나의 고민 거라기도 했다.

*

또 급식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어느날 어느 남자 아이가 자기가 코로케를 안 먹으면 너가 먹을 거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 눈은 빤짝걸렸다. 그래도 되? 그러더니 남자 아이는 그 코로케에 침을 뱉었다.

이래도 먹을거냐? 이래도 먹으면 너 인정\~ 식신 인정 이러면서 깔깔 웃었다. 다른 아이들도 깔깔 웃는다.

나는 너무 화가나서 침이 뭐가 중요하냐며 먹었다. 그거를 보고 아이들은 다 웃고 나를 놀렸다.

난 뚱뚱한 내가 좋았다.

음식을 많이 먹고 웃긴 캐릭터인 나는 여자가 아니여서 좋았다. 놀림을 당해도 가끔은 나는 이대로 평생 뚱뚱하고 못 생긴 채 죽는건가? 하는 불안이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 안 쓰려고 노력 했다.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니까 지금 아빠가 믿긴 하지만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를 많이 먹고 예쁘다고 해주었다. 아빠는 나에게 여경찰이나 여트럭운전사가 멋지다며 남자들 직업을 하는 여자가 멋지다고 이야기했었다. 엄마는 이모들과 같이 살을 빼야한다고 어릴 때부터 나에게 이야기 했고, 성형도 하고 싶으면 시켜준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 했던 적있다.

오빠들은 지금도 나를 보면, "오, 스모선수!"이러면서 뚱뚱하다고 놀리기도 한다. (스모선수들에게 정말 죄송한 마음이다)

오빠가 너무 싫다. (어릴 때 오빠가 야쿠자에게 쫓겨서 죽는 꿈을 꿨는데 그 때 왜 슬퍼했는지 모르겠다)

*

나는 엄마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거를 좋아했다. 엄마 친구들이 진짜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사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른과 이야기 하는거 같다고 나를 좋아했다. 너는 이모 친구들과 똑같이 말해. 참 웃겨 하면 깔깔 웃었다.

*

나는 아이들과도 존댓말을 쓰고 이야기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좋아해"라는 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는 사람이다. 나이는 상관 없이 거리가 먼 사람은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는 것이고 그들에게도 의사가 분명 있다.

처음에 본 교수님께 "귀여워\~" 하면서 가까이가서 갑자기 머리를 쓰담 쓰담하거나 셀카를 찍고 SNS에 올리지는 않다. 그냥 귀엽다는 것은 만만하다는 것이니까 실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존중하기에 귀엽다고 한 한다.

근데 오랜만에 친척 집에 갔을 때 사건이 떠진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가 (예상) 있었다. 먼 친척인 것 같은데 어째든 아이라고 해서 귀엽다며 아이 취급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고 딱히 이야기를 할 것도 없었으니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근데 걔가 갑자기 저의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한거 있죠. 나는 거절 의사를 친절하게 전달했지만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는다.

나는 그를 존중하면서 (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가 한 대 나를 때렸다. 심지어 꽤 쌔게.

그 때 나는 참았다. 쌍방으로 갈지 순간 고민 하다가, 그래 때리면 지는거다, 쌍방은 안돼, 하면서 아무리 화가나도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그는 계속 해서 격분을 했다.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고, 눈물까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울고 싶다, 그래 나도 어른인척 하지말고....

"너, 아까 나 때렸지, 말로 잘 못 하니까 때리는 거다 메롱\~"

이러면서 자리를 떠났다. ( 정말 지금 생각해도 최악이다)

그 후에 그분은 자신의 어머니와 저의 어머니께서 밀고密告하러 가셨는데 추석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들은 바빠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쳐 드시고 계시는 남성분들께 가서 또 꼰지르러 가셨는데 이미 술에 많이 취한 아저씨들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나를 미친년이라고 부른다.

이야기4.md#0290

꿈에서 깼는데 흩어져서 아지까직 떠다니는 것 같은 그런 말들을 느끼는데

그래 이 것이 꿈이요,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고 서서히 사라진다.

하늘이 빨강색과 바란 색을 섞은 듯한 어두움 속에서 강의 흐름은 계속 이어나는 데 소리가 안 들린다.

자동으로 나오는 그 목소리, 깜빡하는 빛의 신호들

신경이 끊어졌다가 다시 연결되며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순과 마주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다시한번 확인 한다. 아니 그런 실제는 없다.

세벽인가, 아니면 아침인가.

여기는 계속해서 어둡고 밟다.

그래서 나는 소리를 치며 도망치는 데 결국 다시 여기로 돌아와버린다.

점들이 나를 쫓아다닌다.

빨강, 바란, 노란...

잡아 보는 데 그 사이에서 수며들다가 또 도망치며 강의 흐름 처럼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방향도 없이

계속 움직인다.

난 너무 무섭고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숨이... 숨을 어떻게 쉬는 것인지 누가 나에게 알려준 것인가?

나는 멋대로 움직인 이 맥박이 심장이 또는 다른 무언가. 그것이 밉기도 하다.

겨울의 바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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