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이라는 게 있다고 믿어?
나는 항상 깊은 밤에서 일어난다. 깨는 것이 아니라 앉아있었던 것 같아.
의식이 바다를 헤엄치듯 흘러 나간다.
밤에 혼자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와 내 컵에서 넘치려고 한다.
뚝뚝 누가 문을 두드리는데 나오니까 거기엔 내가 서있었다.
안녕, 어 안녕.
냉장고가 소리를 내며 순간 눈을 떠보니 거기엔 내가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구멍이라고 부른다.
구멍, 공허, 아무것도 없는 무(無)
그게 뭐 어때서?
목욕탕에 혼자 뜨거워지는 얼굴을 물속에 넣고 상상한다.
이 물이 계속 뜨거워지면 나는 뼈가 되고 녹아버릴거라는 생각을 했던 6살 때 나를.
있잖아 생각해보니 심해에 갈 수 없구나. 내가 나의 내장때문에 폭발해버려.
내가 심해에 도달하기전에 나의 육체와 의식은 분열해버릴 것이다.
그런데 못 가지는 않지, 심해는 빛이 도달하지 않지만 서서히 내려가니까.
안녕, 어, 안녕.
난 마무야, 너는?
무의미한 거를 하는 날의 목표
-어른쪽만 걸어가기/ 왼쪽만 걸어가기/ 바닥 같은 색깔만 다니기
-카페에서 커피 아닌거 마시기 (커피가 너무 먹고싶어도 참기)
-식당에서 제일 맛없어보이는 것을 시켜 먹기
-광고 전화를 받고 이야기 들어보기
-길가에 앉아 있기
-식물을 한시간 정도 보고 있기
-책의 냄새 맡기
-땅 파 보기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 하기
-은행에서 번호표 먼저 뽑고 뒤에 와서 사람 많아서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기
아릴때 있잖아. 장을 보고싶거든. 그래서 돈도 없는데 장을 보고 싶어서 하루에 3,4번 같은 마트에서 계산까지 한 다음에 지갑을 까먹었다고 하고 죄송하다고 하는 "놀이"를 몇번이나 했다가 자주 직원에게 혼났다.
혼날 때는 엄머 어디있어? 이런 식으로 혼났는데, 엄마는 밖에서 일을 했다. 공장에서.
그래서 그런지 나는 부모님에게 공부나 학교 생활때문에 혼난적은 없지만, 학교 선생이나 이웃 어른들에게는 많이 혼났고 버릇없는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을 나도 알 고 있었다.
학교에서 부모들 사이에서 우리 부모님은 왕따라고 난 생각해서 슬펐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발적?! 왕따였기에 왕따가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아빠도 집단으로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같지는 않았다.
어느날 학교 수업 참관날에 어떤 동급생의 어머니가 나를 불러 혼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왜 혼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교에서 자주 엄마에게 전화가 가서 몇번이나 죄송하다며 엄마가 머리를 숙이는 일이 많았다.
어떨 때는 소방훈련을 하는데 다들 신발 신은 채 운동장에 도망가야하는 훈련이 있었다. 근데 나는 이게 훈련인데 왜 신발을 신은 채 도망가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래서 나랑 한번 또 있었는데 그 친구만 신발을 갈아 신고 운동장에 나갔더니 교사에게 이러다 너희는 화재로 죽었을 것이라고 엄청나게 혼났고, 학우들은 그 말을 듣고 죽었을 거라고 놀렸다.
그 때도 아마도 엄마에게 전화가 갔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끝나고 음악 동아리를 했었는데 ( 이것도 이상한게 자연스럽게 남자들은 운동, 여자들은 음악을 하는 분위기 였다) 내가 클럽 대표를 했었다. 왠지 어릴 때는 자주 눈에 뛰고 싶고 그랬다. 지금은 전혀 안 그렇다.
근데 그 교사가 쉬는 날 없이 주말도 방가 후도 계속 연습을 시킨 것 있지. 그래서 친구들은 그 남자 교사를 싫어했어.
그래서 난 제안을 했지. 싫으면 안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친구들과 작전을 만들어 이번 주말은 연습을 다 같이 결석하기로 했고, 다 같이 결석해야지 교사에게 저항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 나름 단체 교섭을 하려고?!했던 것 아닌가 칭찬을 받고 싶다.
근데 주말이 되니까 또 부모님께 전화가 가더라고. 누군가가 혼자 출석했고 교사에게 다 이야기를 해버렸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이 일이 나 혼자 꾸민 일이고 내가 강제로 파업?!을 시켰다고 이야기 한 것이었다. 슬펐다.
또 엄마는 학교에 가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나는 얌전해야지 엄마를 귀찮게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거짓 사과와 눈치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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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나면 멘날 슈퍼에서 미역 라면을 사 먹었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슈퍼 옆에 앉아있었는데 뭐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근데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항상 노울을 보면서 울고 사라지고 싶다고 느꼈지만 "괜찮아, 너에게는 수많은 너가 안에 있으니 괜찮아"라고 자신에게 내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 하면서 버티었다.
나는 가끔 욕조나 화장실에서 내가 나라는 몸에서 빠져 나가는 거를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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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들은 공원에서 축구를 하는데 여자들은 그거를 보고 남자애들 구경 했다. 누가 멋지다거나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수다를 떠는데 난 왜 여자애들을 껴주지 않는지 화가 났다.
어느날 남자애들보다 먼저 공원에 도착해서 내가 먼저 왔다고 내가 야구를 할거라고 야구 장비를 들고 써있었다. 여자애들에게 같이 야구를 하자고 했지만 여자애들은 싫다고 했다. 남자애들은 나를 놀리고 앞에서 축구하기 시작했어.
나는 여자애들에게 짜증났다. 나약한척 바보인척 하는 애들에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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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 가위 바위 보 라는게 있었다. 누가 결석하면 급식이 몇개 남을 때가 있었다. 국이나 나물은 남으면 자유롭게 더 먹을 수 있었지만 코로케나 밥 우유 등은 갯수가 정해져 있어서 결석이 나와야지 먹고싶은 애들이 앞에 나와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항상 가위바위보에 참여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데 여자애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우유가 싫었고 우유는 메일 따른 애에게 주고 주는 대신에 다른거를 받고 그랬다.
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귀속말로 자기 대신에 가위바위보에 나가 달라고 했다. 너는 항상 나가니 부끄럽지 않잖아, 라고 했다. 이유는 많이 먹는거를 다른 애들이 보는거 싫어했기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줬지만 왜 나에게 부탁을 하는지 살짝 기분 나빴다. 근데 그게 내가 보여줘왔던모습이긴 했다. 누군가가 나를 여자 취급하는것이 싫어했기에 남자들만 하는 것이 용납할 수 없었다. 집에서 여자니까 하면서 오빠보다 일을 많이 시키는 것도, 밥을 조금 덜 주는 것도.
나는 여자든 남자든 똑같다고 생각했지만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차이가 각인되니까 나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여자이기 싫은데 여자라는 이름으로 틀에 넣어버리니까 그거를 거절하려면 그것과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하지만 여자가 아니면 남자라는 선택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자들에게는 거절을 당한다. 여성스로움의 틀에 들어가지 못 한 나는 또 여자들에게 거절을 당한다.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내가 하는 행동이나 좋아하는 것을 여자/남자의 틀 안에서 이야기 되는 것이 불편했다. 근데 내가 누구인지 가끔 모르게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나를 만든 것은 나의 말이나 행동들인데, 그 것도 나의 것은 아닌 것 같은 것 있지...
근데 지금 생각하면 여자들, 남자들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일대 일로 만나면 여자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 없이 자주 놀았다. 아 근데 노는 방식도 또 달랐 던 것은 나의 고민 거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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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급식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어느날 어느 남자 아이가 자기가 코로케를 안 먹으면 너가 먹을 거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 눈은 빤짝걸렸다. 그래도 되? 그러더니 남자 아이는 그 코로케에 침을 뱉었다.
이래도 먹을거냐? 이래도 먹으면 너 인정\~ 식신 인정 이러면서 깔깔 웃었다. 다른 아이들도 깔깔 웃는다.
나는 너무 화가나서 침이 뭐가 중요하냐며 먹었다. 그거를 보고 아이들은 다 웃고 나를 놀렸다.
난 뚱뚱한 내가 좋았다.
음식을 많이 먹고 웃긴 캐릭터인 나는 여자가 아니여서 좋았다. 놀림을 당해도 가끔은 나는 이대로 평생 뚱뚱하고 못 생긴 채 죽는건가? 하는 불안이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 안 쓰려고 노력 했다.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니까 지금 아빠가 믿긴 하지만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를 많이 먹고 예쁘다고 해주었다. 아빠는 나에게 여경찰이나 여트럭운전사가 멋지다며 남자들 직업을 하는 여자가 멋지다고 이야기했었다. 엄마는 이모들과 같이 살을 빼야한다고 어릴 때부터 나에게 이야기 했고, 성형도 하고 싶으면 시켜준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 했던 적있다.
오빠들은 지금도 나를 보면, "오, 스모선수!"이러면서 뚱뚱하다고 놀리기도 한다. (스모선수들에게 정말 죄송한 마음이다)
오빠가 너무 싫다. (어릴 때 오빠가 야쿠자에게 쫓겨서 죽는 꿈을 꿨는데 그 때 왜 슬퍼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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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거를 좋아했다. 엄마 친구들이 진짜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사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른과 이야기 하는거 같다고 나를 좋아했다. 너는 이모 친구들과 똑같이 말해. 참 웃겨 하면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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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과도 존댓말을 쓰고 이야기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좋아해"라는 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는 사람이다. 나이는 상관 없이 거리가 먼 사람은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는 것이고 그들에게도 의사가 분명 있다.
처음에 본 교수님께 "귀여워\~" 하면서 가까이가서 갑자기 머리를 쓰담 쓰담하거나 셀카를 찍고 SNS에 올리지는 않다. 그냥 귀엽다는 것은 만만하다는 것이니까 실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존중하기에 귀엽다고 한 한다.
근데 오랜만에 친척 집에 갔을 때 사건이 떠진다.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가 (예상) 있었다. 먼 친척인 것 같은데 어째든 아이라고 해서 귀엽다며 아이 취급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고 딱히 이야기를 할 것도 없었으니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근데 걔가 갑자기 저의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한거 있죠. 나는 거절 의사를 친절하게 전달했지만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는다.
나는 그를 존중하면서 (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가 한 대 나를 때렸다. 심지어 꽤 쌔게.
그 때 나는 참았다. 쌍방으로 갈지 순간 고민 하다가, 그래 때리면 지는거다, 쌍방은 안돼, 하면서 아무리 화가나도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 그는 계속 해서 격분을 했다.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고, 눈물까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울고 싶다, 그래 나도 어른인척 하지말고....
"너, 아까 나 때렸지, 말로 잘 못 하니까 때리는 거다 메롱\~"
이러면서 자리를 떠났다. ( 정말 지금 생각해도 최악이다)
그 후에 그분은 자신의 어머니와 저의 어머니께서 밀고密告하러 가셨는데 추석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들은 바빠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쳐 드시고 계시는 남성분들께 가서 또 꼰지르러 가셨는데 이미 술에 많이 취한 아저씨들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나를 미친년이라고 부른다.
꿈에서 깼는데 흩어져서 아지까직 떠다니는 것 같은 그런 말들을 느끼는데
그래 이 것이 꿈이요,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고 서서히 사라진다.
하늘이 빨강색과 바란 색을 섞은 듯한 어두움 속에서 강의 흐름은 계속 이어나는 데 소리가 안 들린다.
자동으로 나오는 그 목소리, 깜빡하는 빛의 신호들
신경이 끊어졌다가 다시 연결되며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순과 마주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다시한번 확인 한다. 아니 그런 실제는 없다.
세벽인가, 아니면 아침인가.
여기는 계속해서 어둡고 밟다.
그래서 나는 소리를 치며 도망치는 데 결국 다시 여기로 돌아와버린다.
점들이 나를 쫓아다닌다.
빨강, 바란, 노란...
잡아 보는 데 그 사이에서 수며들다가 또 도망치며 강의 흐름 처럼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방향도 없이
계속 움직인다.
난 너무 무섭고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숨이... 숨을 어떻게 쉬는 것인지 누가 나에게 알려준 것인가?
나는 멋대로 움직인 이 맥박이 심장이 또는 다른 무언가. 그것이 밉기도 하다.
겨울의 바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