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계획이나 의도대로 살아가지 않는 생명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가 그러하다.
비온 뒤 단단하게 솟아오르는 잡초들도 매우 그러하다.
이 상황에서 인간이 상상하는 기술은 관리의 기술이다.
조정하기 힘든 생명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질문이지만
인간은 야침차게 그 질문으로부터 구체적 방법들을 고안한다.
잡초들이 그 기술에 의해 잠시 어떤 모습이 되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지속되기 힘들다.
기술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에 대해 추가적인 대처방안을 짜는 것만이 또 다른 기술은 아닐 것이다.
난 다른 기술을 부리고 싶다.
이 쪽의 계획을 저쪽에 적용하는 것 이외에.
도시에서 이주해 산촌 같은 농촌에 산 지
10개월쯤 지났다.
여기엔 사방이 풀이다. 잡초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거칠게 자라 길과 구조물을 덮는다.
그러나 도시엔 그런 무성함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초록이 싱그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공원의 잔디, 잘 다듬어진 골프장도 그려진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특히 여름에 초록은 푸르름이 아니라
푸르댕댕한 공포다. 나는 좀 무섭다.
하지만 마구 자란 잡초들의 모습은 낯설긴해도 솔직하다.
그 솔직함이 도시를 매일매일 덮는다면 어떤 풍경일까.
그 풍경이 만들어내는 난감함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그 난감함을 마주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투입될 기술이 무섭다.
빠르고 정확한 대처는 어떤 순간에 빛을 발해야 할까.
요즘은 자연을 자주 보긴 해도
사실 상품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또는 광고에 둘려싸여.
자연도 상품 안에 등장하고
광고를 위해 자연의 모습을 덜 자연적으로 가공하기도 한다.
만약에 우리가 무성한 잡초에 둘러싸여 산다면 어떨까.
서울역 앞 노숙자들을 멍하니 보다가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雜草)
[잡초]발음듣기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 농작물 따위의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해가 되기도 한다."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란다니 엄청 매력적인데
라고 생각은 했으나
택배로 예초기를 주문했고
시멘트로 마당을 다 덮어서
잡초를 뭉개버릴 생각만 하고있다.
나는 기술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
잡초는 그런 선택은 못하지만
다른 차원의 선택을 하며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운다. 혹은 저절로 그렇게 된다.
저절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기술은 나에게는 없다.